Introduction

개관 및 연혁

학림사 소개


학림사는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1번지로 수락산 남쪽에 위치해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통사찰이다.
경내는 오랜 역사를 대변하듯 심장부의 보호수인 노송(老松)을 중심으로 고목의 느티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다. 학림사의 유래는 산세가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듯 학포지란(鶴抱之卵)의 형국을 갖추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엇으며,복잡한 서울도심속에서도 마치 멀리떠나 대자연의 숲속에 안겨있는 듯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사계절 빼어난 경관의 사찰이다. 특히 지하철 4호선 종착역 당고개역이 신설되면서 교통이 더욱 편리해져 기도와 참배는 물론 가족이 함께 주말등산까지 겸할 수 있어 웰빙은 물론 학생들의 삼림욕 코스와 산행체험 등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학림사에서는 법회, 경전강의, 문화강좌 등을 설치 운영하고 나아가 유치원과 어린이집 그리고 노인대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종합적인 복지활동과 포교활동을 펼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


천년고찰 학림사


나한기도도량으로 인근에 명성이 자자했던 학림사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1년에 원효대사(617~686)가 창건하였다. 이후 고려시대 까지 법등이 꾸준히 이어져 공민왕 시기에는 왕사 나옹스님(1320~1376)에 의해 크게 번성하였다고 전한다. 학림사의 연혁을 말해 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81년(고종 18년)에 편찬된 『학림암중수기』이다. 이에 따르면 세월이 흐르면서 절의 창건사에 관한 문서들이 거의 유실되어 창건주나 사적을 알지 못한다고 전한다. 따라서 신라시대 원효대사의 창건기나 고려 때 나옹스님이 주석한 현존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스님들이 서울 근교인 청평사(淸平寺), 회암사(檜巖寺) 등지에서 수행 정진하면서 교화활동을 하셨는데 바로 학림사도 그 중의 한 곳이었다고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유재란(1597)으로 큰 화를 입어 소실되었다가 1624년 무공(無空)화상이 폐허로 남아 있던 곳에 법당을 지어 중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무공스님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수락산 학도암(鶴倒唵)에 있는 자료에 따르면 1624년에 학도암을 창건하였고 학림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1년 9월 당시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俯事) 김순항(金淳恒)이 쓴 『학림암중수기』따르면 다음과 같다. 1780년(정조 4년) 최백(催伯)과 궤징(軌澄) 스님이 낡고 기운 곳을 바로 잡아 중수하였으나 1830년(순조 30년)에는 주담화상이 고쳐 세웠다. 이후 세월이 흘러 도량이 노화되자 1880년(고종 17년)에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상(營想). 경선(經敾) 스님이 중수의 원을 다시 세웠다. 이에 따라 판관(判官) 하도일(河道一) 의 주선으로 하사금을 이용하여 마침내 새롭게 절을 중수하게 되었다. 또한 경선스님은 화주로서 불사의 중책을 맡았는데 1885년에는 근처 학도암에 초빙되어 불상 1구와 탱화 6점을 새로 조성 하였다. 이에 『천도산학도암개금탱화시주록기』에 따르면 경선스님은 ‘양공(良工) 경선화상’ 으로 탱화를 그리는 스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918년 4월에는 주지 금운(錦雲)화상이 네 번째로 중수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연응(淵凝)스님의 『鶴林唵大房與各澱閣重修記』를 보면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하여 작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하여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학림사의 연혁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덕흥대군묘(德興大君墓)와의 인연이다. 덕흥대군(1530~1559)은 조선 중종의 아들로 이름은 이초(李苕)이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어 수락산에 묻히니, 아들인 선조가 1568년 흥국사(興國寺)에 원당을 짓고 덕흥대군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에 따라 흥국사와 내원암(內院唵) 그리고 학림사는 봄, 가을로 덕흥대군의 제(齊)가 있을 때마다 각종 제물을 부담해야 했으며 심지어 묘소로부터 십리나 떨어진 학림사를 묘소의 경내로 지정하였다. 1927년 무렵에는 절이 도정궁(都正宮) 소유가 되면서 전각이 퇴락하고 점차 대중이 줄어드는 등의 고충이 가중되었다. 조선시대 자복사찰(資輻寺刹)은 궁궐의 상궁이 드나들며 왕실의 부귀와 자손창성을 기원하게 되므로 각종 지원과 혜택을 받았지만 이에 못지않은 고충과 폐단을 겪었던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뒤로 한 채 낡고 퇴락해진 학림사는 한국전쟁을 겪게 되면서 전각이 소실되고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접한 도원스님이 과거의 역사와 도량을 복원하기 위해 불사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뜻을 같이 한 주지 덕오스님이 불사에 박차를 가하여 현재와 같은 도량으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학림사 산책